
잊혀진 전쟁 (1950-1953)
한국전쟁의 시작
1950년 6월 25일, 북한군은 제2차 세계대전 후 설정된 38선(군사분계선)을 넘어 대규모로 남한을 침공하였고, 이는 결국 한국전쟁으로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유엔의 결의와 미국 및 소련의 한반도 정부에 대한 긴밀한 개입으로 인해 이 외국 분쟁은 여러 국가가 얽히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북한군이 38선을 넘어 남한을 침공하자 유엔과 미국도 즉각 이 전쟁에 참전하게 되었습니다.
미주리함의 전쟁 참전
북한이 남한을 침공하던 당시, 해군의 유일한 현역 전함인 USS 미주리는 미드십먼(해군 장교 후보생) 크루즈, 즉 젊은 장교들의 여름 실습 항해 중이었습니다. 미주리함의 미드십먼 승무원들은 크루즈를 마치고 노퍽 항구로 돌아와 승조원을 하선시키고 탄약과 보급품, 인원을 보충하였습니다. 1950년 8월 19일, USS 미주리는 태평양과 전쟁터로 출항하였습니다.
전쟁 준비를 위해 미주리함은 진주만 조선소에서 소규모 정비를 받았습니다. 전간기 동안 일부 주포가 제거되었기에, 진주만 조선소는 14개의 오어리콘 20mm 기관포를 새로 장착하고, 빈 기관포 포탑에 4개의 보포스 40mm 포를 추가했으며, 허리케인 피해를 입은 40mm 기관포 1문을 교체하였습니다.
1950년 9월 15일, 전쟁 첫날 미주리함은 52발의 16인치 포탄을 발사하여 헬리콥터 관측병의 지원으로 삼척 인근 철교 2곳을 파괴하였습니다. 이후 며칠간 해안 포격 임무를 수행하며 포항 일대에서 적을 공격했고, 보급을 위해 일본으로 복귀하였습니다.
인천 상륙 작전
미주리함은 9월 19일 인천에 도착했으나, 허리케인과 악천후로 인해 인천 상륙 작전 지원에는 늦었으나, 수원에서 서울까지 가는 도로를 따라 적을 타격하는 해안 포격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10월에는 미주리함이 아서 스트럽르 제독이 지휘하는 제7함대 기함이 되었습니다. 10월 12일에는 미쓰비시 제철소를 포격하였으며, 1시간 내에 주포로 96발을 발사하였습니다. 10월 13일에는 탄천을 포격하였고, 10월 26일에는 원산 상륙 작전을 지원하였습니다. 다음 날인 10월 27일에는 밥 호프와 마릴린 맥스웰이 미주리함에서 해군의 날을 기념하여 세 차례 공연을 하였습니다.
장진호 전투
유엔군은 북한군을 38선을 넘어 북쪽으로 몰아내었으나, 10월 말 중국과 소련의 개입으로 유엔군은 다시 남쪽으로 후퇴하였습니다. 미주리함은 장진호 철수 작전 중인 해병대를 엄호하며 흥남에서 해병대의 철수를 지원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미주리함은 미주리함의 전 함장 중 한 명인 로스코 힐렌코터 소장이 이끄는 제90.8 임무부대와 함께 작전을 수행하였습니다.
1950년 12월부터 1951년 3월까지, 미주리함은 한국 동해안에서 해안 포격을 지속하며 제77 임무부대 항공모함의 엄호 임무를 수행하였습니다. 그 기간 중 고성, 강릉, 탄천, 송진을 포격하였으며, 2월 3일에는 이승만 대통령을 접대하였습니다. 3월 2일에는 조지 C. 라이트 함장이 어빙 T. 듀크 함장을 대신하여 함장으로 취임하였습니다. 3월 말, 미주리함은 하와이와 미국 서해안으로 향하며 첫 한국 배치 임무를 마쳤습니다.
첫 번째 배치 통계 (1950년 9월 – 1951년 3월)
탄약 종류 | 발사된 포탄 수 |
---|---|
16인치/50구경 포탄 | 2,895 rounds |
5인치/38구경 부포탄 | 8,043 rounds |
두 번째 파견 (1952–1953)
전함 미주리호는 1952년 9월까지 다시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습니다. 그때까지 완성된 네 척의 아이오와급 전함 모두가 다시 현역으로 복귀하여 한국에서 순환 파견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두 번째 파견 이전, 미주리호는 조선소에서 추가 정비를 받았습니다. 9월 4일, 워너 엣설 대령이 미주리호의 지휘권을 넘겨받아 실베스터 대령의 후임으로 부임하였습니다. 이후 미주리호는 다시 한반도로 향했습니다.
이번 파견에서는 **클라크 제독(Joseph J. Clark)**이 이끄는 **제7함대의 기함(旗艦)**으로 활동했습니다. 첫 번째 파견 때와 마찬가지로 미주리호는 제77기동부대(Task Force 77) 소속으로 항공모함의 엄호 임무와 함께 해안 포격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원산, 단천, 청진, 성진, 차호, 함흥, 흥남, 태돌이, 고저 등 여러 도시가 미주리호의 포격 사정권에 들어갔습니다. 11월 20일, 미주리호는 이승만 대통령을 다시 한 번 함상에 영접하며 승조원들이 레일 위에 정렬해 환영식을 가졌습니다.
1953년에도 항모 엄호 및 해안 포격 작전은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3월 5일, 북한 해안포 진지로부터의 공격으로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이는 한국전쟁 기간 중 미주리호가 처음으로 적의 포격을 받은 사건이었습니다. 3월 10일에는 다시 포격을 받았으며, 이 날 미주리호는 5인치 포탄을 무려 998발 발사하여, 5인치 포 운용 역사상 하루 최다 발사 기록을 남겼습니다.
3월 25일, 미주리호는 고저 인근 목표물에 대해 16인치 주포 102발, 5인치 부포 61발을 발사하며 한국전에서의 마지막 포격 임무를 수행했습니다.
1953년 7월, 판문점에서 정전 협정이 체결되었고, 휴전선이 설정되어 남북한 간 분단이 유지되게 되었습니다.
두 번째 파견 통계 (1952년 9월 – 1953년 3월)
탄약 종류 | 발사된 포탄 수 |
---|---|
16인치/50구경 포탄 | 3,861 |
5인치/38구경 부포탄 | 4,379 |
전함 미주리호의 역사